지뢰 도발 사건 거치면서 '협상으로 전쟁 방지 가능' 등 세 가지 교훈 확인

"8·25 합의는 남북 간 협상으로 위기 타개한 최초의 사건"… 희망의 메시지

"남북 신뢰 쌓기 위해 작은 것부터 실천"… 남북이 힘 모아야 '균형자' 역할

김형오 전 국회의장(현 부산대 석좌교수)
*편집자 주=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14일 중국 톈진(天津) 빈하이(濱海) 신구에서 열린 빈하이 포럼(2015 Binhai Forum on Peace and Development in Northeast Asia)에서 '남북한 상호 신뢰 제고를 위한 방안'을 주제로 개막연설을 했습니다. 김 전 의장은 최근 북한의 목함지뢰 및 포격 도발에 따른 한반도 위기를 남북 간 협상으로 평화적으로 타개한 데 대해 높게 평가하면서 남·북이 서로 자극하는 표현을 자제하면서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중국국제문제연구기금회·중국인민외교학회·톈진시공공외교협회 등이 공동 주최한 이번 포럼에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도 연설자로 초청됐습니다. <데일리한국>은 김 전 의장 측의 동의를 얻어 연설 요지를 칼럼 형식으로 게재합니다.

[데일리한국= 김형오 전 국회의장 연설 요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남북한 문제에 접근하려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한국 정부나 남쪽 의견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남쪽 시각이 많이 반영됐으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발전, 그리고 통일의 초석을 닦는 일이라면 나와 견해가 다른 분의 발언에도 귀를 기울이겠다.

북한의 지뢰 도발 사건으로 확인된 세 가지 교훈

지난 8월 4일 DMZ(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이 설치한 목함지뢰가 폭발했다. 같은 달 20일엔 상호 포격 사태까지 일어나 남·북한 간에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양측은 전쟁 직전 단계까지 가는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하는 한편 최고위급 긴급 회담을 열어 담판에 들어갔다.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회의는 극적인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 사항을 이행하겠다는 후속 성명이 양쪽에서 잇따라 발표되었다. 목함지뢰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의 몇 가지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휴전은 언제든지 전쟁으로 갈 수 있다는 뜻이다. 2) 전쟁이 터지면 남북 모두 심대한 파괴를 각오해야 한다. 3) 협상과 회담은 전쟁 방지와 평화 유지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렇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휴전선이 그어진 지 올해로 62년째다. 동서 245km, 남북4km의 좁은 벨트를 사이에 두고 양측 1백만 이상의 정규군과 고도의 군사 무기가 밀집되어 있다.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세계 전사상 가장 오랜 기간 휴전이 유지되는 ‘비결 아닌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남북이 서로 막상막하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어 쉽게 전면전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8·25 합의는 남북 간 협상으로 위기 타개한 최초의 사건

이번 목함지뢰·포격 도발도 지난 수십 년 동안 남북한 간에 일어난 일련의 긴장 조성 사건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얻게 된 교훈 내지 진전이 있다. 3)항에서 적시했듯이 남북 간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는 남과 북이 새롭게 싹틔운 커다란 희망지수의 조그만 시작이다. 남북 간에 협상으로 위기를 타개한 최초의 사건으로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앞으로 남북 간에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사건들을 ‘8·25 합의’(위 사건을 이렇게 부른다) 정신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전례와 자신감을 보여준 점에서 희망적이다. 즉 3)을 이룸으로써 1)과 2)로 가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다음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남북 양쪽은 상대방을 자극해서는 안 되고 또 쉽게 자극받아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서로 체제가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신뢰 없이 이룰 수 있는 대화나 협상은 없다. 평화를 원하거나 전쟁을 막으려면 서로 신뢰부터 쌓는 노력을 해야 한다. 쌍방이 조금씩 양보하며 타협해나갈 때 신뢰의 탑이 쌓아진다. 상대방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나 주장은 신뢰를 쌓기는커녕 불신과 갈등만 증폭시킬 것이다. 그 동안 남북한은 한 손으론 탑을 쌓고 한 손으론 허무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신뢰를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상대방을 자극하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남북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 쓰지 말아야 할 단어를 정리해 쓰지 않기로 합의하고 발표하기를 먼저 권하고 싶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이면 상대방도 듣기 싫은 법이다.

남북이 서로 자극하는 용어 쓰지 말고 상대방 체제 인정해야

남북 간에 가장 긴요한 과제는 상대방 체제에 대한 인정이다. 북한은 3대 세습제를 실행하고 있는 특이한 국가다. 남한은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체제가 바뀐 적은 없다. 1948년 이후 지속되어 온 남북 양쪽의 이질적 체제는 선악의 차원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남한의 '통일 대박론'도, 북한의 '핵 무장론'도 아니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나라들의 비판과 우려 속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핵만이 북한 체제와 정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북한 체제에 대한 확고한 보장은 핵이 아니라 남한만이 할 수 있다. 국제사회의 현실이 그렇다. 북한이 남한과 손을 잡아야 체제 보장과 남북 공존·번영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그 첫걸음은 지난 8·25 대화로 시작되었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는 발언을 하지 말고 약속을 지키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신뢰의 탑은 ‘함께’ 쌓아야만 세워진다.

한반도는 공교롭게도 중국·일본·러시아와 지리적 국경을 마주하고 있고, 남한에는 미군이 상주하고 있다. 요컨대 ‘미·중·일·러’라는 이른바 ‘글로벌 4’의 직접적 이해가 교착하는 세계 유일의 지역인 것이다. 남북 간에는 여전히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지 않았으며, 신뢰가 아직 없다. 주변 4강은 한반도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결정적 영향력이나 주도권을 쥐고 있지 못하다. 남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미묘한 힘의 균형이 한반도의 휴전과 평화를 지탱하고 있다. 한반도는 불안과 공포를 발밑에 디딘 채 위장된 평화가 수십 년째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평화 유지비용(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전쟁 대비 비용)은 엄청나다. GNP 대비 국방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에 한국과 북한이 빠질 수 없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만이 지역 협력 체제나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주변 각국이 강력한 글로벌 파워를 가져서이기도 하지만 중간에서 매개 역할을 해야 할 한반도의 남북이 서로 으르렁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북이 힘 모아야 4강의 균형자로서 동북아 평화에 기여

남북한이 힘을 모아야 4강의 균형자로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 거듭 강조하건대 남북한 간에 먼저 신뢰를 쌓아야 한다. 그것이 현재와 같은 군사적 대치와 긴장 상태를 완화하는 첫걸음이다. 큰 것부터 할 수도 있지만 작은 것, 쉬운 일부터 시작해도 좋다. 방법이나 순서가 문제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상대를 자극하는 용어를 쓰지 않고 합의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최고 책임자는 주변의 강경파·주전파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목함지뢰 및 포격 사건 이후 나는 남북한 지도자들이 주도적으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궁극적으로는 통일의 과업을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읽었다. 그 결실로 다가올 긍정과 낙관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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