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유불리 따지는 여야의 선거제도 협상은 '개혁으로 포장된 당리당략 접근'

뿌리깊은 대립 정치 벗어나려면 외부 기구에 맡겨 선거제도 혁명적 개혁 필요

탈(脫)지역구 ‘지사형’ 인재도 필요… 중·대선거구, 권역별 비례대표도 검토해야

유성식 시대정신 이사
[데일리한국= 유성식 시대정신 이사 칼럼] 이번에도 제대로 된 정치 개혁, 정확히 말하면 선거제도 개혁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국회의원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지난 13일 국회 정치개혁특위에 20대 총선의 선거구 획정 기준과 선거제도 개편안을 제출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여야 정치권은 “합의되지 않았다”며 제출을 미뤘다. 선거구 획정 시한은 10월13일인데 여야가 아직 획정 기준조차 마련하지 못했으니 원칙과 내실 있는 선거구 획정과 여타 선거제도의 개선은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다.

여야의 선거제도 협상은 '개혁으로 포장된 당리당략'

이제 여야의 관심은 선거구 획정에 따른 총선 유·불리와 조정 대상 선거구 의원들의 생존 투쟁에 온통 쏠릴 것이다. 전례에 비춰보면 이것만 따지고 조정하는 데도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 이건 개혁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은 처음부터 예견됐다. 선거제도 논의가 정치권의 자발적인 문제 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가 총선의 인구 상·하한선 3대1이 국민의 평등권 침해라며 2대1로 기준을 낮출 것을 결정한 데 따라 이 문제에 손을 대게 된 것이다. 발단이 외적 강제에 있었던 만큼 능동적이고 근본적인 논의를 기대하는 게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현행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1988년 13대 총선부터 시행된 이래 숱한 개편 논의에도 불구하고, 7번의 총선이 치러지는 동안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2004년 17대 총선에 도입한 것 말고는 변화가 없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정치권의 소극적 태도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나마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역시 17대 총선 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다.

선거제도는 반드시 ‘제대로’ 개혁돼야 한다는 점에서 이렇게 흘러가는 현실이 걱정스럽다. 세계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는 엄중한 대내외 환경 속에서 정치 시스템의 일대 개혁 없이는 나라의 장래, 다음 세대의 삶의 질을 담보할 수 없다. 국가를 흥하게도, 망하게도 하는 것은 그래도 정치이고 정치인들이기 때문이다.

정치 시스템 개혁의 요체는 권력구조 변경을 위한 개헌이 첫 번째가 되겠지만, 청와대가 개헌을 극구 반대하는 상황에서 개혁의 에너지는 선거제도에 집중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여야와 국민이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전략적 목표를 공유하는 토대 위에서 진행되는 게 순리다. 선거제도 개편의 지향점이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 어떤 목표에 닿아 있는지를 정치권이 공감하고 국민에게 제시한 뒤 이에 부합하는 방법론을 택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 최근 거론되고 있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를 여야가 주고받자는 식의 맥락을 결여한 접근은 곤란하다. 개혁으로 포장된 당리당략의 인상도 진하게 풍긴다.

이분법적 대립 벗어나 타협 정치 위한 선거제도 개혁 필요

의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선거제도 개혁에 공감하는 이들이 여야를 불문하고 상당히 많다. 대통령 단임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가 골자인 소위 ‘87년 체제’는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라는 인식이다. 지역패권주의와 대통령 5년 임기 내내 계속되는 여야의 상시 대결 구도로는 갈수록 복잡화·다양화·글로벌화하는 사회적 문제를 감당해내기 어렵다고들 한다. 박근혜정부가 중점 추진 중인 ‘4대 개혁’부터가 그렇고, 저출산·고령화와 사회 양극화 같은 문제들이 지금의 정치 시스템과 리더십으로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지역주의 타파와 함께 합리적 대화와 연대, 타협의 정치문화 정착을 위한 중·대선거구제, 권역별 비례대표제, 석패율제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이 연장선상이다. 여기엔 다당제(多黨制)에 대한 바람도 실려 있다. 뿌리깊은 이분법적 대립의 정치를 벗어나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가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이를 위한 적절한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작 개혁 논의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제도 변화에 따른 의원들의 기득권 상실 공포가 첫째이고, 이런 의원들에게 룰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는 게 둘째가 될 것이다. 정치를 하는 목적이 ‘차기 총선 당선’에 고정돼 있는 의원들로 북적이는 국회를 바라보는 것은 갑갑하다. ‘특권 내려놓기’를 입에 달고 사는 선수(의원)가 경기 규칙(선거제도)을 직접 정하는 희한한 풍경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한 지난 27년 동안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자조(自嘲)도 나온다.

"선거제도의 혁명적 개혁으로 한국 정치 업그레이드 해야"

하지만 바뀔 것은 바뀌어야 한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지만, 국회 정개특위의 선거제도 개편 논의를 원점부터 다시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비전과 의지가 있다면 시간이 모자랄 것도 없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최근 국회선거제도자문위가 제출한 결과 보고서에 대해 “본질적 부분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 당장 도입이 안 돼도 20대·21대 국회에서 논의가 이어질 수 있도록 큰 그림이 필요하다. 정치 틀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혁명적인 방안들에 대한 고민이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지적에 동의한다. 향후 정개특위의 활동 방향도 이렇게 다시 잡혀야 한다고 믿는다.

이에 덧붙여, 정치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지역구에만 얽매이지 않는 인물, 비례대표가 된 뒤 다음 총선에 출마할 지역구를 기웃거리지 않고 자기 분야와 나랏일에서 성과를 낼 인물 등 ‘지사형’ 인재들을 많이 수용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으면 좋겠다. 이는 물론 제도만으론 부족하고 여야 지도자들의 안목과 결단이 수반돼야 하는 문제다. 나아가 선거제도 개혁은 국민적 동의를 거쳐 이번 선거구획정위처럼 외부 기구에 맡기고 그 결정을 국회가 무조건 수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야말로 진정한 특권 내려놓기가 될 것이다. 이 정도의 강력한 충격이 없는 한 시대가 요구하는 선거제도의 혁명적 개혁과 한국 정치의 업그레이드는 ‘언제나 희망 사항’에 그칠 수 있다.

■유성식 시대정신 이사 프로필
서울대 동양사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한국일보 정치부장- 대통령실 시민사회비서관, 국무총리실 공보실장- 시대정신 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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