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화정' '광해' '왕의 얼굴' 등에 비친 광해군의 여러 갈래 얼굴

광해군 15년 천하의 문제는 옵션 부재..의자왕처럼 옵션 많아도 문제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포트폴리오 법칙..상황 따라 달라져야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
[데일리한국= 천영준 연세대 책임연구원 칼럼] 드라마 '화정'을 보면 고뇌하는 광해군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영화 '광해'에서는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는 이상주의적 정치가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는 아버지 선조의 비겁함을 극복하려는 따뜻한 예비 군주로 등장한다.

드라마 '화정' '왕의 얼굴' 등에 비친 광해군의 여러 얼굴들

그러나 '화정'은 광해군(차승원 분)이 지니고 있었던 콤플렉스와 자신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우선 그는 임진왜란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이상인 ‘분조’(分朝)를 맡았다가 승계 순위에서 밀려날 뻔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버지에게 뒷통수를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해의 즉위는 항상 아버지 선조를 힘으로 제거하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과연 그 스스로 선조의 죽음에 능동적으로 개입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분분하지만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라는 모략가들의 힘을 빌어 급작스런 부친의 유고를 연출해낸 것만큼은 틀림없다. 의혹의 근거가 되는 ‘독이 든 식혜’나 ‘약밥’과 같은 것들은 상당히 부차적인 것이다. 그러나 광해에게 왕이 된다는 것은 혁명을 의미했다. 아버지는 율곡 이이, 퇴계 이황, 그 이후에는 류성룡, 이덕형, 이항복 등 조선 최고의 드림팀을 갖고도 두 번이나 국정을 말아먹었던 지도자다. 게다가 걸핏하면 신하들과 상의하지 않은 채 명나라의 외교관 심유경과의 비밀 협상으로 조선의 절반을 일본에 넘길 위험에 처하거나, 왜군보다 명군에게 더 많이 착취당한 상황까지 초래했다.

광해군은 전형적인 도학(道學)군주였던 아버지가 조선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있는 인물이라고 봤다. 그래서 경제 시스템의 논리에 맞게 양반 대지주들도 군포와 세금을 정확히 내는 대동법(大同法)을 기획한다. 귀족들의 특권을 뿌리째 부정할 만한 대개혁을 기도한 것이다. 그에 더해 외교 정책으로는 실리주의를 취했다. '화정'에서 그려진 광해군은 무기 공학에도 해박한 기술경영자다. 그래서 유황이 많이 나는 일본으로부터 24만근의 재료를 납품받아 직접 <화기도감>을 꾸려 화약 생산을 국산화하려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자가적으로 핵보유국이 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사인이었다. 그리고 명나라가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과 후금과의 분쟁으로 시끄러울 때 과감하게 파병하지 않겠다고 결단했다. 주된 이유는 ‘두 번의 왜란 당시 왜군보다 명군의 갑질이 더 심했다’는 것이었다. 일련의 과감한 조치들은 광해군이 직접 예비 최고경영자로서 국정을 운영해 보고 나서 얻게 된 확신에 기반한 것이었다.

광해군 15년 천하의 문제는 '옵션 부재'

이처럼 능력과 경험이 탁월했던 광해군이 왜 15년밖에 집권하지 못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권력기반 역할을 했던 북인이 상대적으로 소수 정파였기 때문이다. 강한 정치 철학을 갖고 있는 서인· 남인과 오랜 국정 경험을 지니고 있는 동인과 달리, 북인은 ‘건달’ 이이첨이 소속할 정도로 약한 집단이었다. 게다가 광해군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많은 민중들과 지배층 사이에서 공히 ‘모순’을 느낄 만큼 엄청난 의식 변화가 필요했다.

혁명 연구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귀스타브 르 봉의 연구를 토대로 혁명의 성공 조건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우선 기존 지배층 내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 갈등이 일어나야 한다. 이해관계의 대립이 성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충분히 민중들에게 납득시킬 만한 가치 갈등이 조성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제도와 큰 연관성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회·문화적 모순들이 고도로 누적되어 있다가 한꺼번에 터져야 한다. 성공한 혁명인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같은 것들이 그랬다. 사실 7년 동안 큰 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지만 광해군이 지배하는 조선은 ‘재건 정국’이었지 ‘혁명 정국’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신념으로 정치적 마케팅을 할 수 있는 국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면 차라리 광해군은 자신의 가치를 대변할 수 있는 여러 이해관계자 집단을 육성하고, 적의 가치로 자신을 브랜딩할 수 있는 전략도 가졌어야 했다.

이를 극복하여 어느 정도 개혁 정권의 안정화에 성공한 인물이 정조다. 아버지의 원수 노론과 정치적으로 대립했지만 정조는 간간이 문체 반정이나 다양한 금서 조치 들을 발동하면서 노론과 철학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의도된 위기로 적들 중 일부를 세력권에 편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몇 가지 옵션이 광해에게는 너무나 부족했다. 인조반정은 그런 광해의 약점을 잘 찾아낸 서인과 남인들의 합작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의자왕처럼 옵션이 많아도 문제다

그런데 반대로 옵션이 너무 많아도 문제다. 백제 멸망을 초래한 의자왕의 케이스가 그렇다. 한때 의자왕은 신라와 고구려를 놀라게 한 성군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당나라 군대와 신라의 태자 김법민(후일 문무왕)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이 연이어 계백과 의직을 전사시키고 수도 사비성을 공략하는 위기를 맞았다. 여러 왕자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수도가 함락 위기에 놓여 왕비를 비롯한 수많은 비빈들과 궁녀들이 대왕포, 지금의 낙화암 주변에서 자살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가 위임한 백제군은 백강(지금은 '백마강'으로도 불린다)에서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를 격퇴하는 데 실패하고 궤멸되어 버렸다.

그 후의 대처에 대해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는 재미있는 기록을 남긴다. 여러 왕자들과 의자왕이 직접 군영에서 마지막 작전 회의를 했다는 것이다. 누구는 직접 웅진성으로 가서 옥쇄(玉碎) 준비를 하자고 종용했고, 어떤 왕자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싸우다 죽자고 제안했다. 그 중 후일 백제 복권 운동을 했던 왕자 부여융은 소정방에게 음식을 바치며 항복을 겸한 강화를 하자고 건의했다. 우왕좌왕하던 의자왕은 모든 카드를 수락하고 융에게는 강화를, 다른 왕자에게는 수비를, 자신과 또 다른 왕자는 웅진성을 담당하는 전략을 택한다. 엄청난 위기 시에 ‘옵션’을 건 것이다. 결과는 참패였다. 소정방과 김법민은 마지막 순간까지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한 백제의 지도자를 조롱하며 그들을 각각 장안과 서라벌로 끌고 가버렸다. 광해처럼 옵션이 너무 없어도 문제이지만, 의자왕처럼 많아도 문제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법칙…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광해와 의자왕의 케이스를 보면 옵션을 적용할 때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일단 다양한 선택지를 만드는 전략은 평상시에 가능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포트폴리오 관리 법칙은 자원이 풍부할 때, 또는 손아귀에 쥐고 있는 힘이 많을 때 가능한 방법이다. 광해군의 경우는 최고 권력을 가졌을 때 여러 방식으로 보험을 두는 편이 나았다. 반면 위기 때에는 자신의 자원이 줄어든다고 봐야 한다. 쓸 카드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의자왕처럼 완전히 판돈을 까먹은 케이스도 존재한다. 그럴 때에는 이런저런 대안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까지와의 대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역발상 전략을 통해 상대방을 놀라게 하거나, 과감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상황을 돌파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상시 다양한 대안을 고려한 투자와 관리를 통해 힘들 때의 돌파 능력을 비축해 두는 작업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개인에게나 기업에게나 항상 유연해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언제나 유연한 전략이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한때는 성공한 기대주였지만 실패로 끝난 광해군과 의자왕의 사례를 통해 ‘옵션’의 진짜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천영준 책임연구원 프로필
연세대 경영학과- 연세대 정보산업공학 석사,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다음소프트 연구자문역- 합창단 Chantez a dieu, 오페라단 '청 ' 자문위원-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현)/저서 <직장인 4대 비극> <바흐, 혁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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