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리스트'와 세계적 음악가들의 삶 속에 드러나는 관계와 콘텐츠
"콘텐츠가 없는 관계는 망한다"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안전거리 필요"
처신이 분명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 모차르트·슈베르트는 배신 당해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
[천영준 연세대 책임연구원 칼럼] 정계에서 마당발로 통했던 어느 정치인의 죽음을 놓고 연일 여러 얘기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리스트’에 오른 주인공들도 몹시 당황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왜 그가 ‘같은 편을 휩쓸고 인생을 마무리했는가’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한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정치집단은 신뢰와 의리가 기본 전제로 깔려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가 생각한 신뢰는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가 명확한 거래적 관계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치 활동이나 개인 생활에 도움이 되는 자금을 제공해 주었으니, 그만큼의 특혜 또는 문제가 생겼을 때의 바람막이 역할을 통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말고도 다른 마음을 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호구'가 무차별적으로 풀어대는 호의인데, 그것에 대해 보상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생각이다. 준 사람 입장에서는 금전이나 향응을 통한 공여 행동(Gift-giving behavior)이 그 다음의 성과까지 함께 동반할 것이라 예측하고 벌인 일이다. 그러나 받는 사람은 ‘선물’이 꼭 자기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수준이 안 맞는 사람과 교제해준 데 대한 대가라고 인식할 수도 있다. 왜 이런 엇갈림이 발생하는 것일까. 관계 속에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바흐·헨델·모차르트·슈베르트의 삶 속에 드러나는 관계와 콘텐츠

필자가 이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향의 연구를 시도해 보다가 어느 음악 전문가를 만났다. 유럽에서 바흐(Bach)의 작품을 자주 연주하는 테너 김세일 씨다. 그는 바흐의 종교곡 중에서도 매우 규모가 크고 서사시적으로 진행되는 ‘오라토리오’(Oratorio : 기도소에서 진행되는 음악이라는 뜻으로 종교극, 또는 종교적 목적을 지닌 대규모 합창곡을 의미)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선보이는 예술가다. 바흐 작품 속 여러 역할 중에서도 김 씨가 자주 맡는 것은 ‘에반겔리스트’(Evangelist)라는 것이다. 복음서 속의 기록자 입장에서 여러 인물들의 대화와 상황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작중 인물이다. 그는 작곡가가 작품을 만들어낸 당대적 상황 속에서 곡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역사주의 접근’(Historical approach)에 많은 관심을 가진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창조적인 예술가들인 작곡가들의 삶 속에서 ‘관계와 그 내용을 채우는 콘텐츠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바흐, 헨델, 슈베르트 등 다양한 작곡가들의 삶에 대해 연표 식으로 연구해 보니 그들이 누구와 소통하고 함께 작품을 만들어 갔느냐, 누구의 후원을 받았느냐가 중요했다. 음악가의 삶을 공부하고 연주 콘텐츠로 풀어내는 사람 입장에서 드는 생각은.

“역사 속 작곡가들도 기업인이나 정치인처럼 흥망성쇠가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플레이(Play)를 통해 생존 수단을 확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바흐(Bach)는 진심형이다. 자신의 음악 작품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만 대화했고, 싫어하는 사람은 철저히 차단했다. 반면 헨델(Handel)은 문어발식 관계를 지향했다. 오페라 사업가였기 때문에 자기에게 도움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만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명작 <메시아>도 그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오페라가 하도 안되니까, 종교곡을 써 보라는 주변의 투자자들 권유를 귀담아 들은 결과다.”

-그러고 보면 바흐는 좋은 사람만 만나기도 바쁜데, 나쁜 사람, 또는 기분 좋지 않은 사람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인물이다. 반면에 헨델은 얼마 전 작고한 모 회장처럼 작품 활동을 위해 정치적 로비도 끊임없이 했던 사람인 것 같다. 바흐와 헨델 모두 성공한 삶을 살았는데,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처럼 반짝 성공을 누렸지만 결국 단명한 사람들은 대인 관계가 어떠했는가.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경우에는 천재 작곡가였지만 사회 생활 측면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모차르트의 경우에는 충동적 성향이 강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작곡가였다. 그렇다 보니 귀족들과의 음악적 관계 속에서도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세 일을 중단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들이 종종 보인다. 슈베르트도 처음에는 오페라나 교향곡으로 명성을 쌓기를 원했고, 그것 때문에 다양한 후원자를 만났지만 별로 평판이 좋지 못했다. 오히려 혼자서 가곡을 썼을 때가 더 작품 활동의 진가가 두드러지는 듯하다.”

-모차르트, 슈베르트가 의외로 유력자들과 친하게 지내고 스스로의 출세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마다하지 않은 면모도 보이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중들도 자주 말씀하시지만, 예술가들끼리도 ‘기가 빨린다’는 말을 자주 한다. 대등한 관계인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가치 없이 누군가에게 퍼주고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모차르트나 슈베르트는 말로만 자신을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던 여러 사람에게 속으며 살았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그런 유력자들 주변에 있으면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본인들의 순진한 마음 탓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날을 위해 아낌없이 퍼주고, 또 노력했지만 결국 응분의 대가를 받지 못한 것 아닐까. 관계 속에 콘텐츠는 없고 정치만 있었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반면에 은둔형 작곡가처럼 평가받는 바흐는 폴란드 왕에게도 궁정 음악가 칭호를 받고, 여러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를 고용하려고 했다. 의외로 사회 생활을 잘 한 케이스다.

“욕을 먹을 때는 먹고, 함께 할 때는 하고, 그런 처신이 분명한 작곡가가 바로 바흐인 것 같다. 그의 음악 전체가 그렇듯이 그는 ‘스토리’를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 후손에게 이야기로서 가치가 없는 행적은 남기지 않으려 했던 그의 모습이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작곡가들은 어차피 17-18세기 사회에서 ‘을’이었다. 을이 ‘갑’에게 극도로 의존하는 상황 속에서 ‘기를 빨리지’ 않으려면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와 차별화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무작정 ‘자원’을 제공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패망의 지름길이 된 것 아닌가 싶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호구 이미지가 있는 작곡가들도 알고 보면 대부분 자초한 경우가 많다.”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적정 안전거리 조성 필요

인터뷰를 정리하던 중 어느 전직 정치인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MB 정부 시절 어느 총리 후보자의 청문회에서 "사람 간에도 안전거리가 필요하다"며 후보자에게 단언했다던 야당 의원의 일화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콘텐츠 없는 관계, 일방적인 조력이 생기는 가장 큰 원인은 극도로 높은 상호의존성 때문이다. 안전거리가 없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이다. 상대방이 없이는 절대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도움을 주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교섭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호구가 되는 가장 큰 원인은 결국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쌓인 ‘정’이 상호호혜성(Reciprocity)으로 바뀔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는 의도치 않은 피해자와 피의자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당연히 더 많이 상처를 받는 것은 ‘준 사람’이다. 작곡가들의 삶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신의 창의성을 상업적으로 잘 포장해 줄 것이라고 후원자들에게 기대했던 모차르트, 슈베르트는 결국 배신당했고 어떻게든 혼자서 길을 개척해 보려고 애썼던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로 이름이 남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낭만적인 작곡가들의 삶과는 또 다른 관계와 정치의 힘이 숨어 있는 것이다. 스스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누군가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 콘텐츠가 얼마나 풍부한지, 적정 거리는 확보되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천영준 책임연구원 프로필
연세대 경영학과- 연세대 정보산업공학 석사,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다음소프트 연구자문역- 합창단 Chantez a dieu, 오페라단 '청 ' 자문위원-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현)/저서 <직장인 4대 비극> <바흐, 혁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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