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군주들 승려들의 지혜를 빌려… 컨설턴트와 비슷한 역할

컨설턴트는 고객이 '듣고 싶은 말'과 '들어야 할 말' 안배해야

정치권과 직장에서 쓴소리 할 때도 지혜 발휘해야 실질적 효과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 칼럼]과거 왕조를 창건한 군주들이 제일 많은 지혜를 빌렸던 전문가들은 누구일까? 바로 승려들이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는 도선(道詵) 스님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하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 무학(無學) 스님이다. 우선 이들은 조직의 공식 역할에 얽매이지 않은 외부 전문가들이었다. 방대한 데이터와 분야별 지식 간의 조합 능력으로 미래를 예측해주는 혜안을 가진 인물들이기도 했다. 게다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접촉할 때에도 외교관 노릇을 하면서 중재자가 되기도 했다. 전문 지식과 함께 정치적 조정 능력까지 갖춘 것이다.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에도(江戶) 막부를 창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난카이(南海)나 스덴(崇傳)같은 승려들의 데이터 분석력과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을 빌렸다. 게다가 가뜩이나 고민이 많은 의사결정자들에게 신통력이라는 명분을 빌어 갈 길을 알려주었으니, 통치자의 의존성은 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군주들이 지혜를 빌린 승려들은 '컨설턴트'의 원조?

그렇다면 오늘날 왕조시대의 ‘국사’들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다름아닌 컨설턴트들이다. IMF 사태 이후 오너의 과감한 결단 중심의 기업집단 운영 방식이 좀처럼 통하지 않게 되자, 조직들은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은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를 바탕으로 기업이 벤치마킹해야 할 대상을 정해주고, 선도 주자의 모습을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구조개혁을 하라고 주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비즈니스 프로세스 리디자인(Business process redesign)이라는 미명 하에 대규모 정리해고를 한다거나, 부서를 없애고 새로운 하부 조직을 설립하는 것 등의 일이었다. 이런 일련의 작업 속에서 비즈니스 컨설팅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클라이언트(Client)였던 대기업으로 이직하기도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출세에 소요되는 기간을 단축하고 높은 급으로 조직에 참여할 수 있는 성공 경로로 통하기도 했다. 비즈니스 컨설팅 다음으로 주목받은 것은 단연 IT 컨설팅이다. 이들도 역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문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금 더 세부적으로 기업의 가치를 개선하기 위해 내부 인프라를 전산화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효과적으로 정보화 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최고정보책임자(Chief Information Officer)를 두고 조직의 위상을 강화해줄 것을 주문했다. 물론 이런 처방은 기업의 정보화가 일반 업무의 효율화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강조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즈니스 컨설팅이나 IT 컨설팅 모두 계속해서 상대방을 대상으로 지식이 이전되면서 ‘새로움’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현란한 PPT 결과물이나 다양한 주문 등으로 조직 변화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특정 산업에 오랫동안 종사한 경험이 없는 컨설턴트가 현업 단위의 혁신을 주문하는 것이 맞지 않다는 비난이 일었다. 더군다나 에너지, 건설 등 보수적인 산업일수록 고유의 ‘업의 본질’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 외부 전문가가 자신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의 자문을 실무 라인에서 불쾌하게 여기게 됐다. 처음에는 경영진들도 자신들의 비즈니스를 객관화해보기 위해 컨설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지만 나중에는 자신들을 떠받쳐주는 실무 조직이 ‘더 이상 시사점이 없다’고 항의하자 좀 더 계약 비용을 줄이는 데 관심을 갖게 됐다. 컨설턴트들이 제공하는 데이터가 특별한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가 '듣고 싶어하는 말'과 '들어야 할 말'을 안배하라

개인끼리 해주는 상담이든, 조직 차원의 자문이든 기본적인 요건이 있다. 누구나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길 원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옳음을 확인하려는 심리적 편향이 있다. 따라서 스스로의 의사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제공한 지식이나 데이터를 활용하려고 한다. 왕조를 창건하는 데 기여했던 승려들은 통치자가 보다 정확한 눈으로 경쟁 사회를 바라보게끔 유도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미래를 그려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무학대사가 계룡산도, 개경도 아닌 ‘한양’이라는 지역을 이성계가 도읍으로 고르도록 주문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시대의 사회·경제적 자산은 계승하면서 최대한 새로운 지역에서 국가 정체성을 만들려고 하는 통치자의 욕구를 읽었기 때문이다. 고려 창건에 기여한 도선국사도 왕건이 이해타산에 밝은 상인 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신라를 통합할 때 일방적인 무력 행사가 아니라 김씨 왕족들과 진골 엘리트들을 상류층으로 껴안는 방식으로 진행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궁예와 견훤이라는 여러 영웅들을 상대하면서 자산을 엄청나게 소진한 왕건은 구 신라가 갖고 있었던 경제력과 전문가 집단의 효율성을 이용하고 싶어했다.

컨설턴트가 클라이언트의 욕구를 정확하게 읽으면 ‘을’이 아니라 ‘영원한 선생님’이 된다. 게다가 공식적인 직책을 주어 등용하려는 시도를 적절히 거절하며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면 여러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는 교섭력도 갖게 된다. 기업들이 비즈니스 컨설팅이나 IT 컨설팅에 대한 의존 비중은 줄이고 해당 분야 지식을 생산하는 전담 부서를 만들고는 있지만 외부를 상대로 아이디어를 갈구하는 성향은 여전한 게 사실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누군가는 ‘을’이 되고 있지만 누군가는 ‘갑’에게 ‘절대 갑’으로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갖고 있는 콘텐츠의 독보적인 현실 조망 능력 못지 않게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읽어 내고, 잠재적인 욕구까지 가르쳐주는 센스를 갖춘 사업자들이 실제로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빅데이터 기반의 마켓 리서치나 오퍼레이션 컨설팅을 제공하는 기업들이 그러하다.

가끔 예언가의 카리스마를 배우면 더 효과적

예언가들이 계속해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내다본 앞날에 대한 정확성뿐 아니라 확신을 심어준다는 것 자체에 많은 이들이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한때 대통령 선거의 향배를 잘 맞춘다는 스님이 있었다. 그는 당시 여당 대표가 대선후보로부터 받아 자신에게 가져온 금일봉의 액수를 정확히 맞추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 그가 대통령을 시해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자신의 라이벌을 조심하라며 ‘차’(車)를 경계하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런 얘기들은 예측력뿐 아니라 카리스마도 조언자의 협상력에 한몫 함을 시사한다. 조직이론가 마이클 해넌(Michael Hannan) 스탠퍼드대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그럴 듯해 보이는’(taken-for grantedness) 진실을 원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는 자신이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질문해 확인하려는 습성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아는 누군가는 어디선가 예언가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컨설팅 비즈니스를 잘 풀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정치권·직장에서 쓴소리 할 때도 지혜를 발휘해야

이같은 컨설팅 기법은 단지 컨설팅업에만 통하는 게 아니다. 정치·행정 분야와 모든 직장, 가정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이다. 정치권과 직장의 보스나 의사결정자에게 쓴소리를 할 때도 그들이 '듣고 싶은 말'과 그들에게 '해줘야 할 말'을 적절히 안배해서 해야 한다. 그래야 실질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진정성을 가진 조언으로 비치려면 무조건 부딪칠 게 아니라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말하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고 일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천영준 책임연구원 프로필
연세대 경영학과- 연세대 정보산업공학 석사,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다음소프트 연구자문역- 합창단 Chantez a dieu, 오페라단 '청 ' 자문위원-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현)/저서 <직장인 4대 비극> <바흐, 혁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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