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기획-국격을 높이자 ⑩]
서비스산업 후진성 계속되면 제조업 1등 상품도 사라져
법규와 규제의 투명성과 예측가능성 확보해야 국격 높아져
국내기업의 해외 진출 연계 등 조건 없이 공적원조 늘려야

허 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
[허윤 교수 칼럼] 한 나라의 격(格)을 '그 나라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품위' 정도로 이해한다면 경제적 측면에서는 '국격(國格)'의 결정 요인은 아래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구촌 나눔과 섬김, 한국 학점은 D

우선 그 나라가 ‘지구촌의 어둡고 그늘진 곳을 밝고 환하게 바꾸는 일’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범지구적 책무(global responsibility)의 이행 정도’가 한 척도가 될 것이다. 남의 불행을 나의 일로 아파하고 이를 함께 극복하려는 ‘나눔과 섬김’의 손길에 지구촌 사람들은 박수와 갈채를 보낸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성적을 굳이 매기자면 안타깝지만 D학점이 아닐까 싶다. 세계의 각종 재난 극복 현장, 절대빈곤의 감소 내지는 퇴치 노력 활동에 한국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우리의 국력과 경제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지원금을 국제사회에, 그것도 남의 눈치를 한참 보다가 마지못해 내미는가 하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인색한 모습을 보인다. 세계 6개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만 달성했다는 국민소득 3만달러, 인구 5천만 이상의 3050 클럽 가입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지만 이들 선진국들과는 달리 우리의 오그라진 손바닥은 도무지 펴지질 않는다. 한국전쟁 후 폐허의 이 땅에 뿌려진 국제사회 숱한 도움의 손길과 1960년대, 70년대 수많은 학생들과 그 가족들의 목숨을 살렸던 ‘눈물의 옥수수빵’을 기억한다면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돌려 줘야 할 때이다.

우리 정부, ‘윈-윈 전략의 덫’에 갖혀

우리 정부의 최근 5년 간 공적원조(ODA) 증가율은 경제협력기구 개발원조위원회(OECD DAC)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연 평균 18%에 이른다. 하지만 규모나 내용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여전히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 경제 규모 대비 ODA 수준은 24개 DAC 회원국 중 최하위권인 22위, 1인당 공적원조 지출액은 월 3천원에 불과하다. ODA 지원 규모 상위 5개국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이며, 경제규모 대비 지원액이 가장 높은 나라는 덴마크,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이다. 이 나라들의 국격은 실로 높다. 중국이 ‘지구촌 무임승차자’로 비난받는 이유는 경제성장으로 G2가 되었지만 범지구적 책무에 여전히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ODA규모 확대와 더불어 맞춤형 지원, 경제발전 경험 전수, 우리 기업.인력 진출 지원 등을 통해 국제적 위상 제고와 글로벌 경제협력 강화에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 해외 원조를 통하여 국내기업의 해외 진출을 연계시키고 청년 일자리도 확대하겠다는 소위 ‘윈-윈 전략의 덫’에 갖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돕는 것이 진정한 나눔일진대 우리 정부는 아직도 원조를 통해 우리의 이익을 함께 도모하겠다는 이기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지난 50년 간 국제사회 도움에 의해 졸부로 성장한 나라인 한국을 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은 이유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what to do) 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what to undo)가 더 중요

두 번째 국격의 중요한 결정 요인은 바로 그 나라 각종 제도와 법규 및 규제의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 지위를 이용하여 사적 편익을 취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나라의 격은 떨어지게 된다. 박근혜정부가 규제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상당수 규제는 부처 차원의 이익과 사적 편익을 취할 수 있는 고도의 장치이기 때문에 관련 공무원들의 저항이 결코 만만찮을 것이다. 창조경제를 구현하고 국격을 높이는 차원에서 정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what to do)’에 쏟을 고민의 절반을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what to undo)에 집중해야 한다. 정부가 ‘더 이상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기업 활동에도 도움이 되는 시대에 우리 경제도 접어든 것이다.

산업별로 정부 부처를 나누고 그 부처에 산업별 규제 권한을 주는 기존 패러다임은 융·복합이 일상화된 창조경제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산업별로 나눠진 규정이 새로운 제품, 새로운 서비스의 생산과 판매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 권한이 부처권한이 되다보니 규제 권한을 둘러싼 부처 간의 정치 게임이 국가의 장래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국회의원 또한 이 게임의 중요한 플레이어가 되었다. 각종 규제를 둘러싼 이권과 이슈의 정치화에 발을 디디고 서서 관련 법률의 제·개정 과정을 사유화하는 정치인이 많아지면서 국격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한국에 진출한, 혹은 진출하려는 외국인 사업가들과 얘기해 보라. 하나같이 한국 정부와 국회를 두려워하고 있다. 공무원에 밉보이면 일단 끝이라는 생각과 한국의 국회는 사유재산도 침해하고 시장경제 원리에 반하는 어떤 입법도 가능한 곳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다. '원칙 금지-예외 허용'의 포지티브 방식의 규제는 이제 '원칙 허용-예외 금지'의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부 뜯어 고쳐야 한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지 않는 국내 규제는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 규제 시스템 개혁을 위한 범정부-국회 차원의 국가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서비스 산업의 후진성, 제조업 1등 제품 사라지게 만들지도

국격을 높일 수 있는 마지막 요인은 우리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 확보에 있다. 지구촌 누구나 믿고 살 수 있는 한국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Made in Germany' 'Made in Japan'에는 국격이 묻어 있다. 1등 정신과 프로페셔널리즘이 나라의 품위를 높이는 것이다. 디램 반도체, 테레프탈산(합성섬유 원료), 선박추진용 엔진, 세탁기 등은 한국이 세계 수출 시장에서 1위를 하는 제품들이다. 우리나라의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 1위 품목 수는 100개 미만으로 세계 14위이다. 중국의 강세가 두드러진 가운데 독일과 미국, 일본 등이 상위에 포진하고 있다.

하지만 서비스 산업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의 현실은 참담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변변한 투자은행, 컨설팅 회사 하나 없다. 세계 일류 교육기관도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 최대라는 로펌도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서비스업이 제조업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서비스업의 핵심적인 생산요소는 고급 인력의 확보인데 이를 위해서는 국내 인재의 양성뿐 아니라 해외 인력의 효과적 활용이 중요하다. 세계적 관행이 통용되는 비즈니스 환경의 창출과 함께 이미 언급한 규제 완화와 행정 절차의 간소화,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및 생활환경이나 언어소통 등 편리한 사회문화 환경의 조성이 시급하다. 서비스 산업의 후진성이 지금과 같이 계속되고 그나마 남아 있는 기업가 정신마저 정부의 실패로 실종된다면 우리의 국격을 높여 줄 1등 제품 또한 조만간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 나라의 격을 높이는 일은 지난한 작업이다. 지구촌 이웃사랑을 묵묵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한편으로는 투명하고도 예측가능한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 힘든 작업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허윤 교수 프로필

서울대 경제학과- 조지워싱턴대 경제학 박사- 서강대 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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